하일렌, @Heilen__0hlife
비록 ‘몬스터 아빠’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지긴 했으나, 한유진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은 마수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나 아르바이트에 출근할 때, 혹은 밤에 잠시 집 밖에 나갈 때 한유진은 종종 제 다리에 몸을 비벼오거나 제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동물들과 마주치곤 했다. 떠돌이 개, 길고양이, 철새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 때문에 회귀 전부터 한유진은 주머니에 애완동물용 간식거리를 한두 개쯤 넣고 다녔다. 회귀 후 한유진이 유명해지고 나서는 몰염치한 인간들이 기승수 사육소 앞에 애완동물을 버리고 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사육소 문 앞에서 처음 보는 동물과 마주치는 건 한유진에게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
한유진은 할 말을 잃은 채 뻐끔거리며 입구에 가만히 앉아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한유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훨씬 연한 올리브색의 눈동자가 이국적인 느낌을 한껏 풍겼다.
일반 주택단지라면야 동네에서 노는 아이 중 하나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기승수 사육소다. 귀중한 전력이 될 마수를 지키기 위해 거대 길드에서 온 헌터들이 삼엄하게 호위를 서는 특수 시설이었다. 30분 전에 봤을 땐 좀 이상하다 싶었어도 기혼자인 헌터가 데려온 아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냥 넘어갔는데, 같은 장소에서 30분 내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보도블록에 핀 잡초로 장난을 치고 있는 걸 보니 보호자를 기다리는 것도 아닌 듯했다. 길을 잃은 걸까? 더 무시무시한 사건인 건 아니겠지. 한유진은 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꼬마에게 다가갔다.
“저기, 혹시 길을 잃었니?”
“…….”
“엄마아빠는 어디 계시니?”
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이는 정말 예쁘게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자라면 틀림없이 여자 여럿 울릴 엄청난 미남이 될 것 같은…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한유진은 핸드폰을 꺼내며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가 집에 갈 수 있게 도와줄게. 이름이 뭐야?”
“…….”
“사는 곳은?”
“…….”
아이는 아무 말 없이 한유진의 눈만 가만히 쳐다보았다. 혹시 말을 못 하나? 우리나라 애가 아닌가? 확실히 동양인의 평균 같은 외모는 아니었다. 그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동복 모델이라도 되나? 이상한 기시감을 떨쳐내며 한유진은 재차 아이에게 질문했으나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짓다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떡잎 스킬.’
다른 건 몰라도 이름과 최적화 초기스킬은 볼 수 있을 터였다. 한유진은 실종아동 신고 전화번호를 누르며 아이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금방 경찰 아저씨들이 와서 도와줄 거야.”
그리고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될성부른 떡잎 스킬을 사용했다.
[□□□ - □□□□□□
현재 스탯 등급 □
성장 가능 스탯 등급 □
최적화 초기스킬
□□□□□ 획득
□□□□□□□ 획득
□□□□□ 획득
※ □□□□□□□□□□□□□□□]
…어? 한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상태 창을 쳐다보았다. 삐약이 때와도 비슷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뜨는 게 없었다. 시스템 연결이 아직 덜 돼서 스킬 설명이 빈약할 수도 있다더니 설마 이런 사태도 벌어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혹시… 한유진은 말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고 침을 삼켰다.
이 애, 인간이 아닌가?
「여보세요?」
핸드폰에서 연거푸 상대방을 찾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유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경찰청 실종아동찾기 신고센터입니다. 여보세요? 말씀 가능하신가요?」
“…아, 네. 죄송합니다.”
한유진은 멍한 얼굴을 한 채 기승수 사육소의 주소를 불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한유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눈을 깜박이더니 입꼬리를 올려 생긋 웃었다. 누구라도 마음이 사르르 녹을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잠시 어안이벙벙한 채 아이를 바라보던 한유진의 입꼬리가 저절로 흐물흐물해졌다. 가슴 한구석에서 따뜻한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 두 명은 간단한 신원 조회와 함께 아이를 발견할 당시의 상황을 확인했다. 조사랄 것도 없었다. 한유진은 유명인이었고 상황은 지극히 간단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아이는 외관상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고 경찰의 질문을 알아듣는 게 분명했는데도 입을 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문지르던 경찰 중 한 명이 한숨을 내쉬며 펜과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튼,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제가 데려가서 보호시설에 인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다면 연락해주십시오.”
경찰은 정중한 태도로 한유진에게 명함을 건네고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자, 그럼 이제 엄마아빠 찾으러 경찰 아저씨랑 같이 갈까?”
“…싫어.”
남자아이를 만난 이후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이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경찰을 노려보면서 슬금슬금 한유진의 다리 뒤쪽으로 걸어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꼭 붙잡았다. 경찰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상한 데로 가는 거 아니야. 엄마아빠가 널 많이 기다리실─”
“싫다고!”
아까보다는 훨씬 큰 목소리로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경찰과 한유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얼굴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한유진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유진은 허리를 숙여 아이의 등을 토닥이면서 아이를 얼렀다.
“그렇게 떼쓰면 안 돼, 쉿, 착하지.”
“…….”
“경찰 아저씨랑 같이 가면 아빠랑 엄마 만날 수도 있는데, 갈까?”
“싫어, 안 갈 거야…….”
급기야 아이는 한유진의 바지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한유진은 난감한 기분에 휩싸였다. 강제로라도 떼어놓아야 하나? 초조한 표정으로 아이와 핸드폰을 번갈아 보던 경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유진은 불쑥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절차상의 문제가 없다면 제가 아이를 보호해도 되나요?”
고민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리다 퍼뜩 놀란 듯 고개를 드는 경찰의 얼굴에 미미한 화색이 돌았다.
“원칙적으로는 시설에 연계하는 게 맞습니다만, 보호자가 나타났을 때 바로 인도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라면….”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에 개정된 법이었다. 던전 브레이크로 다수의 사상자와 실종 아동이 발생하면서 안 그래도 부족했던 보호시설이 터져나가자, 정부는 전과 기록이 없고 신원이 보증된 사람이며 보호자가 나타났을 때 아이를 바로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일반 가정에도 아동을 위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설을 당장 늘리기는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 때문에 한유진은 처음 던전이 터졌을 당시 한유현도 실종자 처리되어 다른 사람 집에 맡겨지는 게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다. 실제로는 S급으로 각성했지만.
한유진은 이미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던전 브레이크 초창기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경찰이 건네는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향후 더 자세한 절차를 위해 서에 출두할 것을 요청받았다. 아이는 그새 울음을 그쳤으나 여전히 한유진의 다리에서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기승수 사육소를 떠나는 경찰에게 수고하시라는 말과 함께 90도로 허리를 숙인 뒤, 한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누군가, 그 아이는?”
“으와아아아악!”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한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와중에 아이가 다칠까 봐 잽싸게 안아 올린 것은 덤이었다. 익숙한 금색의 두 눈이 흥미로운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뭡니까, 이렇게 갑자기─”
“형님 오랜만! 어라? 이 애는 누구야?”
“…….”
성현제의 등 뒤로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걷는 걸음걸이 뒤로 피로에 지친 송태원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한유진은 오전 중에 잡혔던 미팅 일정을 떠올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료를 한 번 더 들여다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미아 신고를 하다 보니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아는 애야? 한 소장님 친척? 별로 닮지는 않았는데.”
“모르는 애예요. 아침에 잠깐 밖에 나왔다가 발견했어요.”
문현아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아이와, 아이를 안은 한유진을 이곳저곳 훑어보았다.
“경찰에 신고는 하셨습니까.”
송태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부터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 묘한 기시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데…. 그는 슬쩍 성현제 쪽을 돌아보았다. 세성 길드장은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어딘가 거슬리는 인상으로 한유진과 아이를 힐끗거렸다. 영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었다.
성현제가 무언가를 질문하려는 듯 입을 열었고, 한유진은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제안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둘의 입에서 나오려던 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떨어진 폭탄 같은 발언에 틀어막혔다. 한유진의 품에 안긴 아이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느리게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빠…?”
“난 모르는 일이네.”
“애를 보고도 그런 뻔뻔스러운 변명이 나와요?”
“정말로 모르는 일이야.”
“와하하, 성현제 이 새끼 이거 완전 쓰레기 아니야.”
“송 실장, 말 좀 해보게. 사건 수습 때문에라도 자네는 내 해외 행적에 대해 거진 알고 있지 않나?”
“…아동복지법 제71조에 따라 동 법률 제17조제6호에서 규정하는 유기 및 방임 행위를 저지른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고….”
“송태원!”
난장판이었다. 이미 미팅의 본 목적은 저 멀리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한유진은 팔짱을 낀 채 경멸의 눈빛으로 성현제를 노려보고, 송태원은 은은한 짜증과 무거운 피로가 깔린 얼굴에 손바닥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으며, 문현아는 옆에서 괘씸하다는 표정 반 웃겨 죽겠다는 기색 반으로 성현제와 한유진, 송태원을 번갈아 힐끔거리고 있었다. 모든 일의 원인인 아이는 순진한 표정으로 한유진이 타 준 복숭아 맛 아이스티를 쪽쪽 빨았다.
“낳지도 않은 자식을 유기했을 리가 없잖나.”
“솔직히 성현제 씨쯤 되는 인간이라면 어디선가 애를 서넛쯤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요.”
“맞아, 진짜 의심 갈 만한 상대가 한 명도 없어? 천하의 성현제인데?”
문현아가 낄낄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성현제는 드물게도 진심으로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쩔쩔매는 성현제를 보며 한유진의 머릿속에 신선하다는 감각이 잠깐 스쳐 갔으나, 곧 그는 생각을 털어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진짜로 애가 생길 만한 짓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습니까?”
“…대체 왜 이런 질문까지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군. 애초에 이 애가 정말로 내 아들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나?”
성현제는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딱 보면 모릅니까?”
물론 한유진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는 빨대로 컵 바닥을 휘젓는 아이를 한번 돌아보고, 성현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눈썹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조금 전에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아이의 얼굴은 성현제랑 판박이였다. 출아법으로 낳았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친아빠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얼굴이 똑같을 수가 있어요?”
“던전 아이템이나 스킬 등으로 모습을 바꾼 것일지도 모르잖나.”
“그건….”
“애초에 인간이 아닐 수도 있지. 환상을 보여주거나 변신이 가능한 마수들도 있고.”
한유진은 반박하려다 글자가 깨져 있던 상태창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성현제의 말대로 마수라면, 저 아이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만일 이게 누군가의 함정이고,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애들까지 위험에 빠지게 되면 어떡하지?
그때, 아이스티를 다 마시고 빨대를 갖고 놀던 아이가 일어나서 성현제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는 성현제가 앉은 소파의 팔걸이를 붙잡더니 폴짝 뛰어올라 얌전히 성현제의 무릎 위에 제 몸을 올렸다. 셔츠를 꼭 붙들고 한유진을 돌아보는 동그란 눈은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아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성현제의 상체에 제 머리를 기댔다.
“아빠!”
성현제는 한유진의 표정을 보고 설득은 글렀다고 깨달았다.
“와… 세상에….”
그는 요정 같은 아이에 대한 사랑스러움과,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내쳐버린 성현제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현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송태원에게선 여전히 불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봐요 성현제 씨, 얘 버리면 저한테 죽습니다.”
“내 아이도 아닌데─”
“당신 애가 아닌 게 뭐가 중요해? 어? 당신은 이렇게 귀엽고 연약한 애가 혼자 거리를 돌아다니게 놔둘 셈이야?”
냉큼 아이 곁으로 달려가 볼을 꼬집고 잡아당기며 ‘정말 천사 같다, 우리 유현이 어렸을 때만큼은 못하지만….’ 등등의 말을 중얼거리는 한유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성현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현아는 웃다 지쳐 이제 눈물까지 흘릴 지경이었다.
“아무튼 성현제 씨가 책임지는 겁니다.”
한유진은 마지못해, 정말 마지못해 아이의 볼을 놓으며 성현제에게서 떨어지려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성현제가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아이의 손이 한유진을 붙잡는 것이 먼저였다.
“아빠…?”
한유진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 저기, 나는 네 아빠가 아니라….”
“아빠… 가지 마….”
커다란 눈에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아이는 우는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한유진은 끄으음,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미간을 짚었다.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데, 성현제에게 책임을 지우긴 해야겠고, 집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을 때의 같이 사는 S급들의 반응도 걱정이고… 고민하던 한유진은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꿍꿍이가 가득한 미소를 지은 성현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아이가 한 소장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아이는 성현제의 품에서 뛰어내려서 한유진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얼떨결에 한유진은 아이가 이끄는 대로 성현제에게 끌려갔다. 자기 손보다 훨씬 큰 한유진의 손을 성현제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이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한유진에게 외쳤다.
“같이 가! 아빠!”
“…아가야…?”
성현제는, 한유진에게는 경악스럽게도,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얼굴로 그의 손을 잡았다. 조금은 거친 손바닥과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한유진은 움찔했다. 성현제는 다시 없을 기회를 잡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유진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
“우리가 같이 키워야 하겠지, 유진 아빠?”
성현제가 서늘하게, 그러나 화사하게 웃었다. 한유진은 등에서 이유 모를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애기곰~”
“아빠곰은 뚱뚱해~”
“엄마곰은 날씬해~”
“애기곰은 너무 귀여워~!”
“으쓱으쓱 잘- 한- 다-!! 꺄하하!!”
아이는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따라 하며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신이 났는지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우리 서월이 씩씩하기도 하지!”
한유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이, 서월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더니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쪼르르 달려갔다. 한유진은 서월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지친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땀을 닦으며 부채질을 했다.
본래의 이름은 알 수 없었으니 아이의 신원이 확실해지기 전까진 임시로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이름을 지어준 것은 한유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유진의 성화에 못 이겨 아이의 이름 후보를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 맞겠다. 이름은 한유현이 말한 후보들 중 아이가 직접 골랐다. 한유현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이것저것 제시한 한자어들을 들으며 무표정한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아이는, ‘서월’이라는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는 그렇게 ‘한서월’이 되었다. 본래 성현제의 성을 따려고 했으나, 아이가 ‘성서월’이라는 풀네임을 듣자마자 입술을 쭉 내밀며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기에 한유진은 자신의 성을 붙여주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한유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 무슨 애가 자기 성과 이름을 골라? 진짜 이상하네.
- 그냥 호불호가 뚜렷한 것뿐이야.
- ……형.
- 유현이 너도 어릴 적부터 싫어하는 게 뚜렷했잖아.
한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서월의 간식을 만들어 주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남겨진 한유현만이 미심쩍은 얼굴로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한잔하게.”
소파에 기댄 한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 시원한 주스 한 잔이 내밀어졌다. 한유진은 고개를 들어 반짝반짝 빛나는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계속 노래를 부르며 율동하려니까 힘들었다. 한유진은 차가운 음료수를 꿀꺽꿀꺽 들이켠 뒤 기지개를 켰다. 성현제가 그의 등 뒤에 쿠션을 대주었다. 잠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으로 한유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주중에는 성현제와 같이 살고, 주말에만 원래의 집으로 돌아간 지 벌써 한 달 반째였다.
기승수 사육소 앞에서 아이가 발견된 날, 저녁이 되기도 전 끝내 한유진은 짐을 쌌다. 회의하러 갔다더니 한유진 소장에 처음 보는 어린아이까지 주렁주렁 달고 온 성현제를 보고 강소영은 대놓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애를 키우신다고요? 길드장님이요? 미친 거 아니에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강소영은 실수했다는 듯 다급히 숨을 들이켰지만 성현제는 개의치 않고 사들일 그림책과 장난감 목록을 전달했다. 솔직히 한유진은 강소영의 말에 동감하는 입장이었으나, 진즉에 생각을 바꿔야 했을지도 모른다.
- 서월아, 세수하고 자야지.
- 현제 아빠가 도와줄까?
- 유진 아빠에게도 잘 자라는 인사해야지.
- 서월아, 야채 먹자. 아 해봐.
성현제는 못하는 게 없었다.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보육교사 자격증이라도 따셨어요? 한유진은 그가 아이를 돌볼 때마다 몇 번이나 묻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성현제는 아이의 발달 수준에 맞는 그림책을 읽어주었고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요리를 해주었으며 세수와 양치를 시키고 장난감을 품에 안겨주었다. 말을 안 듣거나 떼를 쓸 때는─그런 일은 거의 없었지만─다정하지만 엄한 목소리로 아이를 단호하게 제지했다. 실로 완벽한 돌봄이었다.
하지만.
성현제는 말없이 한유진의 옆자리에 앉아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고, 셔츠 주머니에 꽂아놓았던 안경을 쓰더니 태블릿을 켜서 메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서 지내며 안경 쓴 모습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던 한유진은 이제 안경 정도는 그럭저럭 무던하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하도 이 모습 저 모습 보다 보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던 성현제의 얼굴도 점점 눈에 익었다.
한유진은 눈을 반쯤 뜬 채 남자의 어깨를 쳐다보았다. 그는 허리를 곧게 세운 채 고개만 숙여 태블릿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고 있었다. 한유진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져도 불편하지 않게 기댈 수 있도록. 여전히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건 심장에 안 좋았고, 사소한 배려를 자각할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찡하고 울린다. 눈을 깜박이던 한유진은 느릿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놀이공원이라도 갈래요?”
“…놀이공원, 좋지. 그런데 갑자기 왜?”
성현제가 다소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냥요, 서월이 데리고 셋이서. 시간 맞을 때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게, 스케줄을 한번 보지.”
성현제는 태블릿을 좀 더 들여다보다 무언가를 입력하더니 액정을 껐다. 한유진은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협상, 결렬됐죠? 그것 때문에 성현제 씨가 많이 바빴는데 아쉽네요.”
“…….”
“통역 아이템 낀 거 아니니까 의심하지 마시고. 당신 표정만 봐도 알겠거든요.”
한유진은 성현제가 확인하는 메일의 단 한 글자도 해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현제가 어딘가 지쳐 있고 기분이 유달리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 협상은 세성에서 꽤나 공을 들였던 종류였다. 당연히 성현제도 몇 개월에 걸쳐 해외를 들락날락하며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시키고자 몹시도 노력했다.
“기분 별로인 거 다 보입니다.”
“이런, 실례했군.”
성현제가 웃으면서 안경을 벗었다. 한유진이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그래서 어디서 한바탕하고 오셨을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여우 같은 파트너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어서.”
“…꼭 그런 비유를 쓰셔야만 합니까?”
한유진은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성현제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 채로 한유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부끄러운 말을 한 건 성현제인데 왜 자신이 더 민망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흠흠, 아무튼 그래서, 기분도 풀 겸 놀러 가자고요. 성현제 씨 스케일이라면 아예 테마파크 통째로 빌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요.”
“그야 가능하다만.”
성현제는 짧게 대답한 뒤 빙그레 웃었다. 창밖에선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스탠드 하나만 켜놓은 거실은 어둑어둑했다. 서월이가 늦네, 한유진은 무심코 화장실에 가겠다고 사라진 아이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성현제의 목소리가 발을 붙들었다.
“오늘 해연의 꼬마 아가씨를 우연히 만났네.”
“예림이를요?”
“자네가 괜찮은지 묻더군.”
“새삼스럽게….”
지난주에도 만나서 한참을 이야기했는데, 성현제랑 같이 지내는 게 그리도 걱정됐던 걸까. 한유진은 문자라도 하나 보내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현제의 목소리가 그를 막아섰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이제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성현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유진은 침을 삼켰다.
“괜찮나?”
“…뭐가요.”
“저 애랑 지내는 게?”
- 이상해, 형.
서월의 이름을 지어준 후, 한유현은 언짢음을 숨기지 않는 표정으로 한유진에게 질문했다.
- 비각성자 예상등급 볼 수 있다고 했잖아. 얘한테는 스킬 안 써봤어?
- 각성자도 아닐 게 뻔한데 굳이 뭐하러 써보냐.
떡잎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면 한유현이 아이를 내버리자고 할까 봐 한유진은 웃으며 말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한유현은 스케치북에 낙서하기 시작한 서월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평범한 애가 아니야.
- …뭐가 다른데.
- 나나 세성 길드장이랑 비슷한데… 그것과도 조금은 다른 느낌이라고.
“…성현제 씨도 서월이를 좋아해 주고 계시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질문입니까?”
한유진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성현제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좋아해 준다고.”
그가 짧게 코로 숨을 내쉬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어투였다.
“잘 돌봐주시잖아요.”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긴 하지.”
성현제의 눈에 서늘한 안광이 스쳤다.
“하지만 내가 저 애를 좋아해 주는 걸로 보이나.”
한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성현제는 완벽한 보호자였다. 흠잡을 만한 일도, 치명적인 실수도, 교육학적으로 해가 될 만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제 배로 낳은 부모라도 성현제만큼 아이를 키우기는 힘들 것이다.
“…….”
하지만 순순히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성현제의 눈빛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 아저씨는 저 애가 좋아요?
- 유진 씨 아이도 아니잖아요.
- 굳이 고생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가 성현제와 함께 서월이를 키우기 시작한 뒤로, 상급 헌터들에게서 꾸준히 받는 언질이었다.
- 같이 있으면… 좀 께름칙하다고요.
박예림도, 노아도, 문현아도, 송태원도, 유명우도, 강소영이나 에블린도 한 마디씩 말을 던졌다. 물론 그들은 한유진의 뜻을 전적으로 존중했으며 자신들이 참견할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만은 어떻게 하지 못했다.
“상급 각성자라면 느끼지 못할 수가 없다네.”
성현제가 한유진 쪽으로 몸을 돌리고 허리를 조금 숙였다. 스탠드를 등지고 선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저 애는 이상해.”
한유진은 한유현의 말을 떠올리고 침을 삼켰다.
- 서월아, 우리 크레파스 가지고 놀까?
- …….
- 대답해야지, 서월아.
- …….
- …서월아.
모르지 않는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이는 평범한 또래처럼 웃고 울고 놀며 재롱을 피우다가도, 때때로 아무런 반응 없이 무시무시한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자리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말을 걸어도, 먹을 것을 주어도, 끌어안고 애정을 표현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간혹 눈이 마주칠 때면, 어린아이의 해맑음 대신 뇌를 파헤치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시야를 파고들었다. 시선에 이빨을 달 수 있었다면 한유진은 진작에 뜯어먹혔을지도 모를 사나움이다. 한유현의 말대로 아이가 태생 S급과 비슷한 존재라면, 민감한 헌터들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놀이공원에 가기 싫으면 관두시던가요.”
한유진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사람 김빠지는 소리나 하고….”
“걱정이라.”
성현제의 눈이 한층 더 깊은 빛을 띠며 가늘어졌다. 그의 손이 천천히 한유진의 뺨을 따라 올라왔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예?”
“항상 궁금했지.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정을 줄 수 있는지.”
약해빠진 F급 주제에, 왜 그렇게까지 S급을 생각하고 걱정하는지.
“정말로 이상하군….”
성현제의 손가락이 한유진의 볼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뺨에 난 솜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았다. 한유진은 다시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주변인의 눈빛을 떠올렸다. 신기한 것을 바라보던 초월자들의 시선과, 이제는 가물가물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부모의 눈길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한유진은 성현제의 손을 붙들어 내렸다. 처음 서월과 만났을 때 무릎에 얹힌 그의 손을 감쌌던 단단한 손이, 이번에는 한유진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가득 찼다. 성현제의 손의 감촉은 그때와 같았다. 따뜻하고 살짝 거칠었다.
“그렇게 못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현제는 아무 말 없이 한유진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그의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깜박이는 금빛 눈 사이로 아주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으나 한유진은 그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이미 두려워할 시기는 오래전에 지나버렸고, 눈앞에 앉은 남자는 그의 유일무이한 파트너였다. 한참을 그렇게 한유진을 쳐다보던 성현제가 몸을 일으켰다.
“놀이공원 티켓은 내가 준비하도록 하겠네.”
성현제의 등 뒤로 한유진이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성현제는 거실에서 가려지는 모퉁이에 기대서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서월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유진과 성현제 간에 오가는 대화를 다 들었음이 틀림없을 서월을 성현제는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늦었으니 잘 자라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평일의 놀이공원은 한적했다… 아니, 한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옆에 선 남자가. 말이 그렇다는 거였는데 설마 정말로 테마파크를 통째로 빌릴 줄이야. 한유진은 질렸다는 얼굴로 성현제를 쳐다보았다. 내키지 않는 기색을 내보일 때는 언제고, 셋이 세트로 맞춘 스프링 풍선이 달린 머리띠까지 알차게 쓴 남자는 폴짝폴짝 뛰는 서월의 손을 꼭 잡고 느릿느릿 아이의 보폭에 맞추어 걷는 중이었다.
“아빠! 나 저거 탈래!”
서월은 신난 얼굴로 눈앞의 놀이기구를 가리켰다. 이미 ‘빙글빙글 찻잔’과 ‘마법의 해적선’을 실컷 즐기고 온 다음이었다. ‘청개구리 대모험’이라고 쓰인 놀이기구는 자리에 앉아 안전바를 내리면, 탑승한 부분이 기둥을 타고 펄쩍펄쩍 개구리가 튀듯 아래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종류였다. 성현제가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놀이기구 정문까지 성큼성큼 걸었다. 아까의 느린 걸음과는 달리 한유진도 겨우겨우 쫓아갈 만큼 커다란 보폭이었다.
“자, 타고 오자.”
“아빠들은?”
“아빠들은 키가 너무 커서 안 돼.”
한유진이 대신 대답했다. 어린이용 놀이기구였기 때문에 탑승 가능한 신장에 상한선이 있었다. 서월은 아쉬운 듯 입술을 꼼지락거렸으나 한유진이 재촉하자 금방 놀이기구 입구로 뛰어갔다. 안전바가 내려가고 작동이 시작되었다. 놀이기구의 몸체가 슝 솟아오를 때마다 즐거운 비명을 내지르는 서월을 보자 한유진의 얼굴에 저절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가?”
옆에 선 성현제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유진은 눈만 굴려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유진 앞에서 늘 그렇듯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즐겁게 노는 걸 보면 귀엽지 않아요?”
한유진은 다시 서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널찍한 놀이기구에 혼자 탄 아이는 신난 얼굴로 팔까지 뻗고 있었다.
“봐요, 기구가 통통 튈 때마다 머리띠도 같이 뛰는 거.”
어느새 카메라까지 꺼내 들어 사진을 찍으며 한유진이 대답했다. 셋이서 세트로 맞춘 머리띠였기에, 그의 머리에도 똑같이 스프링이 달린 귀여운 풍선이 씌워져 있었다. 성현제는 그런 한유진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유진이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은 순간 한유진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다가온 얼굴에 한유진이 흠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성현제의 입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한유진의 귀가 조금씩 달아올랐다. 불가항력이었다. 주춤거리는 한유진을 향해 성현제가 턱 밑에 양손을 모아 대고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휘었다.
“현제도 똑같은 머리띠 했는데, 현제도 봐주게나.”
“……미친, 토할 것 같으니까 그만 하세요.”
한유진은 구역질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층 더 멀어졌다. 순간적으로 설렌 스스로를 때리고 싶었다. 이 인간이 S급만 아니었으면 그냥 한 대 후려치는 건데…. 성현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서운한 표정을 내보였다.
“매정하군.”
성현제는 축 처진 눈썹을 한 채─한유진은 가증스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다시 허리를 세우더니 한유진의 머리에 있는 머리띠 장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스프링 장식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모처럼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러 나왔는데 어울려주면 좋을 텐데.”
한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가족은 무슨, 우리 가족은 유현이랑 예림이랑 명우거든요. 아, 피스랑 삐약이도. 노아 씨도 껴드려야 하고요.”
“몇 달간 같이 산 건 나인데.”
“그건 임시 계약 같은 거고. 전 주말마다 집에 갔잖아요. 그보다 그런 말은 진짜 본인 가족이 생기시면 하시지 그러세요.”
과장된 울상을 짓던 성현제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 한유진은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알아차리고 성현제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성현제는 작동이 끝나 가는 놀이기구를 응시하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글쎄,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는데.”
한유진은 심장이 물속에 잠겨 드는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무슨 소립니까.”
“S급, 그것도 길드장이 평범한 가족을 이루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분노나 비웃음도, 능글거림도 장난기도 없는 담백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한유진은 성현제의 말이 뾰족한 창이 되어 자신의 폐부를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명치께가 아프고 숨이 막혔다.
“…한신의 박민규 같은 케이스도 있잖습니까.”
“물론 어디나 예외적인 경우는 있게 마련이지만.”
성현제가 팔짱을 끼며 한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본래도 큰 키였으나 한유진은 그가 갑자기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나나 도련님, 리에트 양 같은 성질을 지닌 헌터라면.”
“…….”
“진심으로 그들이 누군가와 행복하게 오랫동안 어울려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한유진은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열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우리 유현이 장가보낼 계획이 A부터 Z까지 다 잡혀 있거든요. 초 치지 마시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길 빌지.”
선선하게 대답하는 말투에는 비아냥이나 조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덤덤히 사실을 고하는 말투가 오히려 한유진을 꼼짝 못 하게 했다. 조금 전 한유진의 머리띠를 갖고 장난칠 때까지만 해도 철없는 아저씨 같았던 성현제에게서는 이제 숨길 수 없는 위압이 흘러나왔다. 그가 한유진을 협박하거나 멋대로 휘두르기 위해 내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공포저항이 활성화되고, 한유진은 무슨 짓이냐며 화를 냈을 것이다. 성현제의 기운은 그저 그가 본래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흘러나오는 무게감이었다.
태생 S급, 원맥자란 그런 존재였다. 한유진은 새삼스레 실감했다.
성현제는 서월이 놀이기구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하더니,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한유진은 뒤따라가며 어디 가냐고 물어보려 했으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리에 옴짝달싹 못 하고 붙박여 시선을 땅으로 내린 그에게 평온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오겠네. 딸기맛으로 좋은가?”
한유진은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문득 그는 놀이기구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돌렸다. 이미 자리에서 내려온 서월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유진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서월아! 다 끝났으면 아빠를 부르지 그랬어.”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순순히 아장아장 한유진을 따라왔다.
“현제 아빠는 아이스크림 사러 가셨어. 서월이가 좋아하는 초코맛 사다 주실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유진 아빠.”
“응?”
고개를 돌리자 말간 올리브색 시선과 마주쳤다. 처음 마수 사육소 앞에서 마주했던 날처럼, 무표정하고 깊이를 모를 눈길이었다.
“아빠는 내가 좋아?”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한유진은 눈을 깜박거렸다. 서월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럼, 아빠는 서월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왜 좋아?”
한유진이 말문이 막힌 사이 서월은 종알거렸다.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빠 친아들도 아니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잖아.”
“…누가 너한테 그런 소리를 했어?”
아이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생각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여도 내심 속으로는 불안해했는지도 모른다. 단란한 풍경은 언제 멈출지 모를 신기루 같았고, 혈연과 제도와 약속으로 묶인 가족과는 다르게 그들의 기반은 불안정했다. 방금 한유진의 입으로도 그들은 가족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던가. 한유진은 침을 삼켰다. 손바닥 안에 잡힌 서월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서월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는 거야.”
- 왜 그렇게까지 하지?
그건 언젠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성현제만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한유진의 행동을 신기해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꺼리기도 했다.
“어느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게 되어 있어.”
그런데도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한유진 자신에게 웃어 주고, 그와 함께하며, 그를 의지하는 순간마다 한유진은 제 삶의 의미를 다시 찾는 기분이었다.
“이유 없이?”
“그럼. 마음이 시키는 거니까, 어쩔 수가 없는걸.”
그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었고 그게 두렵거나 불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행복했다. 이미 한 번 소중한 존재들이 박탈당한 삶을 경험해 보았기에, 더욱더.
서월은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계속해서 질문했다.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도?”
“이상한 사람이 어디 있어.”
한유진은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실었다. 작은 손이 꽉 잡혔다.
“혼날 짓을 했으면 혼나고, 잘못된 길을 가면 고쳐야지. 하지만 원래부터 이상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밀어내면 못 써.”
“…….”
“아빠는 아빠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설령 이상하더라도 끝까지 끌어안고 갈 거야.”
서월이 대답하기 전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가득 든 성현제가 돌아와서 둘의 대화는 끊겼다. 아이스크림을 나란히 베어 문 셋은 조용해졌다. 한유진은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베어먹으며 제가 한 말을 곱씹었다. 원래부터 이상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밀어낼 순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랑을 멈출 수는 없다.
한유진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린이용 기차와 회전목마까지 타고서야 그날의 놀이공원 투어는 끝이 났다. 막판에 졸음 가득한 얼굴을 하던 서월은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지더니, 집에 도착해서도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유진도 하루종일 아이를 데리고 바깥을 돌아다녀서 피곤하긴 매한가지였다. 쌩쌩한 건 성현제뿐이었다.
“좋겠네요, S급의 체력은….”
“애는 내가 씻길 테니 가서 먼저 자게.”
성현제는 연신 하품하는 한유진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아이를 안고 사라졌다. 한유진은 천근만근 밀려 내려오는 눈꺼풀을 간신히 부릅뜨고 씻고 침대에 누웠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 후 몇 시간이 지났을까, 한유진은 문득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 뒤척거리며 다시 자려던 한유진은 방안 어디선가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월아?”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아이는 방 한가운데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공기가, 그럴 리 없는데도, 물먹은 솜처럼 몸을 짓눌렀다. 한유진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아직 새벽인데 가서 자야지, 서월아. 왜 여기 왔어.”
“아빠.”
아이가 한유진을 부르며 천천히 침대로 다가왔다. 한유진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에 급하게 호흡을 들이켰다.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저건 서월이인데, 그냥 걸어오는 것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나는 인사를 하러 왔어.”
서월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유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인사?”
추가적인 질문을 덧붙이기도 전 한유진의 몸이 고꾸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무언가가 엎드린 그의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잠옷에 구멍이 뚫리고 한유진은 박제된 나비처럼 바닥에 고정되었다. 날카로운 금빛 금속이 사방에서 빛을 발했다.
“서월아?!”
한유진은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으나 눈앞의 아이는 표정 하나 변화하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흰색의 스파크가 튀며 따끔거리는 통증이 온몸을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그제야 한유진은 자신을 고정한 금속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수색자의 사슬…?”
“유현이 삼촌이 나한테 서월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
아이가 쪼그려 앉아 경악에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하였다. 올리브색 눈이 잘 벼려진 검처럼 번뜩 빛났다.
“삼촌은 무의식중에 짐작해버린 거야. 내가 진짜 누구인지.”
서월(曙月). 새벽녘까지 지지 않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달.
그가 다시 일어섰다. 변함없이 어린아이의 작은 체구였으나 바닥에 엎드린 한유진에게는 거인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의 그림자가 한유진을 덮었다.
“나는 초승달의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해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어.”
바깥 문에서 스파크가 지직거렸고, 타는 냄새와 함께 무언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고함치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한유진은 몸을 비틀어 봤으나 단단히 고정된 사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힘주어 발버둥 치자 옷의 일부가 찢어지며 뜯겨나갔고, 이내 사슬이 더 늘어나 헐거워진 옷을 꽁꽁 싸매버렸다. 한유진은 이를 악물고 눈을 치켜떴다.
“그래서… 날 죽이면 그 힘을 얻기라도 하는 거야?”
“정확히는 흡수하면, 이지만. 아빠가 아니라 현제 아빠 쪽을.”
서월이, 초승달의 파편이 아이의 얼굴로 포식자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유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가볍게 숨을 내쉰 서월이 한 손을 들었다. 한유진은 그의 손가락 끝이 모래시계 속 아주 고운 모래처럼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이건 심술일 뿐이야.”
콰광!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문짝과 벽의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성현제가 발에 신긴 정장 구두를 내던졌다. 구두에 무슨 짓을 했는지, 서월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간 구두는 붙박이장 문을 와지끈 부수었다. 그는 잠자리에서 뛰쳐나온 듯 가벼운 옷차림이었는데 바짓가랑이 끝은 이미 해지고 타들어 가 있었다. 잠옷은 던전 부산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성현제가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제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안 해, 안 할 거야.”
서월이 손을 내저었다.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미량의 빛처럼 반짝이는 입자들이 공기 중에 퍼지다 사라졌다. 손가락의 형태가 점점 희미해졌다. 성현제가 맹수의 울음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온전한 모습으로 죽고 싶으면 최대한 빨리 떨어지는 게 좋을 텐데.”
공포저항 창이 떴다가 사라졌다. 서월이 수색자의 사슬을 거두고 한유진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 부근이 찢어져 티셔츠가 어깨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성현제가 스탠드를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와 한유진을 안아 들었다. 괜히 얼굴이 붉어져 한유진은 성현제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저 안 다쳤어요, 옷만 찢어졌습니다. 내려 줘요.”
“알고 있어.”
이제까지 들어본 것 중 제일 싸늘한 성현제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한유진은 순간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가 다시 풀었다.
“알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라네. 아마 무사하지 않았다면….”
적대감과 살의가 가득한 눈이 조금 전까지 어르고 달래던 아이에게 향했다. 서월이 어깨를 으쓱했다.
“공격 안 한다니까 그러네. 못 이겨.”
“…….”
“처음에는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나도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리고 흡수를 시도했다면 제대로 맞설 수 있었을 텐데.”
한유진의 입에서 무심코 질문이 새어 나왔다.
“흡수?”
“초승달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축적된 힘.”
그렇게 말하며 서월은 천진난만한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상황이 아니었다면 심장이 위험해질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런 존재를 눌러 앉힌 양육자가 대체 누군가 싶었지.”
말을 계속하면서 서월은 방 한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현제가 여차하면 다시 공격할 태세를 갖추려는 듯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서월은 무심히 그들을 지나쳐 좁은 탁자 위에 놓인 머리띠에 손을 뻗었다.
“그럴 만하더라.”
“…….”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올곧은 애정이었어.”
본래의 성질조차 잊고 그의 세계에 녹아들도록, 목적조차 뒤로 한 채 달콤한 역할에 취하도록. 한유진은 아무리 이상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끌어안겠다고 선언했다. 어떠한 거짓이나 가식이 섞이지 않은 대답에 아이는 그의 본질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조차도 애정의 늪에 삼켜졌음을 자각했다.
서월은 이제 형체가 불분명해져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으로 낑낑대며 머리띠를 썼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어달라는 듯이 가벼운 말투로 그가 덧붙였다.
“이건 내가 갖고 갈게, 아빠. 그 정도는 되지?”
“…서월아.”
“안녕, 잘 있어, 유진 아빠, 그리고 현제 아빠.”
아이가 활짝 웃었다. 순간 눈이 따가워지면서 방을 가득 채우는 환한 폭발이 일어났다. 반짝이는 빛의 입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벽녘의 희미한 빛만이 방안을 어슴푸레하게 비추었다. 성현제는 잠시 안전한지 주변을 한 번 더 살피었다가, 한유진을 침대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그리고.
“…우나?”
한유진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이상한, 거 압니다. 방금 전에 제가 죽을 뻔했단 것도…, 그런데.”
훌쩍거리며 코를 들이마신 한유진이 성현제의 시선을 피했다. 울음을 참는 듯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정을 주었잖아요, 한 달 반이나.”
“…….”
“…역시 이상한가요?”
잠겨 드는 목소리로 한유진이 물음을 던졌다. 성현제가 언젠가 흘렸던 한 마디, 잊고 넘어갔던 말이 기억의 수면에 떠올랐다.
“어딘가 이상해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도 사랑해 버리나 봐요.”
“유진아.”
성현제가 손바닥으로 한유진의 뒤통수를 감쌌다. 한유진의 뺨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품 안에서 웅크린 정수리에 성현제는 낮고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접촉된 피부를 타고, 한유진의 몸이 움츠러들다 가늘게 떨리는 감각이 그대로 느껴졌다. 성현제는 한유진을 침대에 내려놓았지만 그를 감싼 팔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그가 상대의 귀에 속삭였다.
“하나만 이야기하지. 나는 유진 군이 이상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네.”
“…왜요?”
샴푸 향기가 성현제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한유진에게서 나던 베이비 파우더 냄새는 사라지고 성현제가 사용하는 샴푸의 옅은 향과 한유진이 지닌 고유의 체취가 뒤섞였다. 성현제는 자신의 일부를 공유했지만, 자신과는 명백히 다른 존재를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한유진이 눈을 비볐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은 건 성현제 씨잖아요.”
“그건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네.”
아직 물기가 다 닦이지 않은 한유진의 눈가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성현제는 대답했다. 한국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을 평범한 고동색의 눈동자였으나 성현제는 그 안에 무엇이 담길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나도 조금은 깨달았을 뿐이야.”
다쳤을 때 걱정시키고 위험에 처했을 때 구하러 와주며 편의점 티라미수와 멋없는 커다란 양초로 생일을 축하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좋아해 준다는 게 무슨 감각인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단 하나의 타인으로 인해 새롭게 변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알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그러니 앞으로 나를 위해서라도 계속 이상하게 살아주겠나.”
한유진의 눈가가 다른 의미로 붉게 물들었다. 그의 입술이 비죽 나왔다.
“지금 하신 부탁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거 아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유진은 눈가를 문지르는 성현제의 엄지손가락을 떼어놓지 않았다.
“사과하지.”
성현제의 눈가가 휘어졌다. 그의 손이 가느다랗고 검은 머리카락으로 옮겨갔다.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았던 모양인지, 성현제의 손길을 받으며 눈을 깜박이던 한유진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말소리가 사라진 방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성현제는 지금 이 순간이 지극히 평안하다고 생각했다. 한유진과 단둘이 공유하는 이 시간이 영원히 반복되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와 함께라면 자신과 같은 존재도 언젠가 소중한 존재를 마음에 심고 가족을 만들어 뿌리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슴푸레한 빛이 비쳐드는 창가에서 성현제는 한유진의 머리카락을 오랫동안 느리게,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아름다운 새벽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