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나이 25살, 정신 나이 30살인 한유진은 큰 절망에 빠졌다. 오동통한 볼살, 조막만 한 손, 짧똥한 다리,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신발이 어울릴 법한 발…. 그러니까,


"내가 왜 다섯 살이 된 건데?! "


한유진은 지금 신체나이 5살이다.


[미안해요, 허니~ㅠㅠ]


 눈앞에 띄워지는 메시지 창에 한유진은 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한참 동안 난리를 치다가, 5살의 체력은 25살 F급의 체력의 반도 채 안 되는 건지 이미 바닥에 주저앉은 지 오래였다. 옆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웃음소리에 잔뜩 골이 나서 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왜 웃고 난리야, 저 인간은. 빙긋거리며 계속 미소를 띠고 있는 성현제에게 지금 자기 꼴이 웃기냐, 라고 한 번 톡 쏘아붙이려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 모습은 아닌지 한유진은 성현제를 흘겨만 볼 뿐이었다.


" 내 공주님은 어찌나 나를 즐겁게 해주시는지."
" 아, 지금 댁 재미있으라고 이 꼴인 것 같습니까? 착각도 유분수지."


아무리 열심히 으르렁거려 봤자 성현제에게는 단지 가르릉거리는 정도쯤으로 들릴 게 뻔해서 한유진은 한 번 더 이마를 짚었다. 이놈의 배구공을 터트려버리던가 해야 되는데. 한유진은 두 손으로도 잡기 버거운 배구공을 붙들었다. 작은 두 손을 쫙 펼쳐도 손이 바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어 한유진은 잠시 체념하기로 했...다가 옆에서 그것마저도 귀엽다는 듯 싱글벙글인 성현제에 그를 향해 배구공을 던졌다. 멀리 날아가지 못한 배구공-잊은 것 같은데 이 배구공은 신입이다.-은 데굴데굴 굴러가다 성현제의 구두 앞 코를 살짝 툭, 건드렸다. 고작 S급이라 아프다네~,라며 엄살을 부리는 통에 한유진은 질색하는 얼굴을 하고는 배구공을 다시 제 앞으로 가져와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허,허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시끄럽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냐. 나 할 일 많은 거 알면서. "


그래, 한유진은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었다. 우리 유현이랑 예림이 저녁밥도 챙겨줘야 하고, 피스랑 삐약이, 벨라레 마석도 먹여줘야 하고, 오랜만에 블루도 만나러 가야 하는데. 그리고 사육소의 소록이가 요즘은 잘 움직이는지도 봐야 할 뿐더러 송실장님께 양 기승수는 언제쯤 데려가실 예정인지 연락도 넣어봐야 한다. `할 일` 목록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며 우는 척하는-가증스럽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 잘생겼다.- 성현제씨를 위해 식빵 테두리 정식도 만들어줘야 한다.


한유진이 머릿속에서 할 일 리스트를 뽑는 데 여념이 없는 도중, 동글동글한 그의 머리를 보고 있던 성현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신입에게 물었다.



" 그러고보니, 이 모습은 정말 유진 군이 5살 때의 모습인가? "
[ 네! 맞아요! 검은 소의 숲 던전 이후에 꼬인 시스템을 만지다가 5살 때의 외형이 불러 와졌어요. ㅠㅠ]
" 흠, 그렇다면 시스템만 안정을 되찾으면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겠군."
[ 역시 체인이네요! 시스템 복구가 끝나면 원래 외형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한 일주일 정도? ]
" 일주일이나 이러고 있어야 해? "


일주일, 에 한유진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눈을 크게 떴다. 올망올망한 그의 눈에 성현제는 웃으며 그를 안아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한유진이 버둥거렸지만 이내 편하기는 한 지 얌전히 안겨들었다. 고작 S급 주제에... 신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나서야 던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그나저나 이 모습으로 가면 유현이랑 예림이가... "
" 길드장님! 안고 계신 건 누구예요? "


신입과 만나기 위해 들어갔던 곳이 세성 소유의 던전이었기 때문에, 던전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소영 헌터가 부리나케 달려와 한유진을 살폈다. 그 모습에 한유진은 다시금 머리가 아파졌고, 성현제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웃는 길드장과 세상 모든 짜증을 담고 있는 얼굴을 한 아이에 강소영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백만 개쯤 띄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라는 설명은 안 하고 계속 웃고만 있는 성현제를 째려본 유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 확실히 자택으로 돌아가시긴 힘들겠네요. 해연 길드장이랑 박예림 헌터가 가만있지는 않을 테고.. "
" 그래서 유진 군이 내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네. "
"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


당분간 같이 살겠다는 폭탄 발언을 한 길드장님과 질색하는 한소장님에 강소영은 이번엔 물음표를 몇억 개를 띄우고 싶어졌다. 아무리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지만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고, 길드장님은 사택에 누군가를 그렇게 쉬이 들이시는 분이 아니었으며 한유진은 왜 저런 반응인지. 강소영은 가까스로 의문을 접고 이성을 붙잡았다. 그럼..


" 우선 옷을 준비하라 할까요? 지내시려면 옷이랑 칫솔이라든지,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을 테니까요. "
" 부탁하네. "


아니, 내가 언제 같이 지낸다 했냐고! 길길이 날뛰는 한유진을 뒤로 한 채 강소영은 빠르게 건물을 벗어났다. 이럴 때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강소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유진은 큰 눈을 굴려 성현제를 째려봤다. 성현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잘생기지만 않았으면 내가 저 상판대기를 진짜. 어쨌든 이미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한유진은 해탈하기로 했다. 유현이와 예림이에게는 던전에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왔기 때문에 며칠은 괜찮을 테고.. 피스랑 삐약이랑 벨라레는 어쩌지. 애들이 잘 챙겨줘야 할 텐데.


한유진이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을 하는 사이, 한유진을 안아 든 성현제는 성큼성큼 던전 건물을 나와 자신의 사택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머리를 쓰고 있는 한유진을 위해 그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히 걷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유진의 모습이 바깥에 알려지면 곤란했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길로 돌아오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성현제의 품에서, 규칙적으로 조금씩 흔들리는 몸과 성현제의 체향에 편안해진 한유진이 잠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조그맣게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에, 성현제는 사택으로 통하는 포탈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잠든 한유진의 따끈한 뺨에 짧게 입 맞춘 성현제는 행여나 자신의 구둣소리가 그의 잠을 깨울까,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 으음... "


 여기가 어디지.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주변에 한유진은 몸을 일으켜 앉아 눈을 비볐다.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손에 화들짝 놀란 것이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머쓱했다. 익숙해지질 않네, 이거... 던전을 나올 때만 해도 밝았던 하늘에 어느새 짙은 노을빛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지. 5살은 원래 잠이 많은 건가, 하고 생각하면서 한유진은 침대 가장자리로 가 걸터앉았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지금의 몸으로는 깨닫게 된 것이, 침대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이다.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중에 침실로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 일어났군. 저녁은 뭐로 하겠나? "


성현제는 물음을 던지며 자연스럽게 한유진을 안아 들었고, 한유진은 자연스럽게 성현제의 목에 팔을 감았다.


" 배는 별로 안 고파서요. 그냥 빵이나 먹을까 합니다만, 성현제씨는요? "
" 이런, 아이는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네. "


뭔소린데. 자신의 다리로 걸을 자유를 박탈당한 한유진은 성현제에 의해 부엌으로 가게 되었고 일반적인 의자가 아닌, 의자 다리가 긴 아이들 전용 의자에 앉게 되었다. 내심 즐기는 거 아냐, 이 사람? 묘한 얼굴을 한 한유진이 성현제를 바라보자 그는 모른 체하며 냉장고를 뒤적이더니 이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머잖아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한유진은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한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저 냄새를 맡고도 배가 안 고플 거 같아? 성현제의 요리실력을 상기한 한유진은 내심 어떤 메뉴가 나올지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다. 파스타? 스테이크? 아니다, 지금은 5살 몸이니까 그런 건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쌀밥에 된장국 같은 거? 성현제가 그런 평범한 음식도 할 줄 알려나. 아, 명우가 해 준 반찬이 얼마나 남았지? 애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으려나. 둘이 또 투닥거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시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한유진의 앞에 차례차례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소시지볶음에 달걀말이, 진미 채와 멸치조림... 정말 아이를 위한 밥상,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진짜 애라도 된 거 같냐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소시지볶음은 왠지 맥주가 생각났지만 어쨌든 맛있었고, 달걀말이는 엄청 부드럽고 폭신했다. 다른 반찬들도 눈이 휘둥그러지게 맛있었다.


" 성현제씨, 진짜 요리 잘하네요. 예전에도 생각했긴 하지만. "
" 나와 결혼하면 매일 먹을 수 있는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
" 지금 이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


으. 인상을 찌푸리자 슬픈 척, 눈썹을 휘어내리는 성현제에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래도 밥도 해주고 재워도 주는데 이건 너무했나. 살짝 몸을 일으켜 자신의 맞은편에서 비 맞은 강아지 눈을 하고 있는 성현제에게 짧게 입 맞췄다. 어떻게 알았는지 은근슬쩍 얼굴을 가까이하는 바람에 중간에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사라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 디저트는 케이크로 할까. 우유? 주스? "
" 우유로 하죠. 성현제씨는 주스? "
" 나도 유진 군처럼 우유로 할까 생각하는데. "


성현제가 설거지를 하고 디저트를 준비하는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중간 성현제가 능글거리는 바람에 한유진이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어쨌든 즐거운 시간이었다. 잠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웃을 수 있는.


디저트까지 배부르게 챙겨 먹고, 양치도 하고 조금 쌀쌀한 날씨에 담요를 덮고 영화를 보는데,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 낮에 그렇게 잤는데도 그러네. 느리게 눈을 끔벅거리며 조용히 하품하자, 성현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등을 토닥거렸다. 따끈따끈한 담요와 따스한 손길에 몇 번을 고갤 꾸벅거리며 졸아버려서 결국 성현제에게 머리를 기대고 웅얼거렸다.


" 성현제씨도 자요, 이제... "
" 그러지. "


보던 영화를 끄고, 성현제는 담요 채로 한유진을 안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잘 자라는 인사는 하고 싶었기에, 한유진은 눈을 꾹 감았다 뜨는 등 어떻게든 잠이 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 한유진의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게, 성현제도 그걸 눈치챈 것 같았다. 흰 이불 위에 눕혀지고, 담요 대신 도톰한 이불이 한유진의 몸을 덮었다. 누워서 물끄러미 성현제를 바라보자, 성현제는 짧게 웃고는 한유진의 옆에 누워 느리게 그의 몸을 도닥였다.


" 잘자요, 성현제씨... "


도저히 졸음을 참을 수 없어서, 한유진은 뭉개지는 발음으로 성현제에게 짧게 굿나잇 인사를 남겼다. 볼에 내려앉는 입맞춤을 마지막으로, 한유진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잘자, 유진아. "


한유진은 근 5일을 그렇게 성현제의 집에서 먹고 자고 놀았다. 아주 잘. 보드랗고 탐스러운 뺨은 발갛게 생기가 돌았고, 성현제는 그런 한유진의 뺨에 몇 번이고 잘게 키스를 내렸다. 성현제는 한유진의 좋은 이동수단이 되었고, 한유진은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러겠냐며 성현제를 부려 먹었다. 한 가지 의심되는 건, 성현제가 S급 육아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한 것이었다. 저 인간이 육아-비스무리한 것-를? ,이라고 생각했던 한유진은 생각을 고쳤다. 성현제에게는 `인간 모빌 (S급)` 정도의 스킬명을 가진 스킬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한유진의 몸이 이렇게나 편할 리가 없었다. 한유진의 기억 속 5살은 이렇게 편한 날이 없었다. 유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더-이건 한유진 자신의 선택이었으니 일단 패스였다-. 스킬이고 자시고 성현제는 유진이를 속속들이 잘 알 뿐만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것 또한 능숙해서, 한유진은 미래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유진의 의심, 혹은 고민의 대상인 성현제는,


" 이런, 불편한 곳은 없나? "
" 동화책을 몇 권 사 왔다네. 자기 전에 읽어주라더군."
" 유진아, 흘리면 안 되지. 지지라네. "


.... 의외로 진심이었다. 물론 한유진은 칠색 팔색하며 싫어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느새 익숙해져 하고 싶은 거 다 하십쇼-, 상태가 되었다. 신입이 말했던 일주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도 했고.


" 성현제씨. "
" 무슨 일인가? "
" 솔직히 말해봐요. 재밌죠, 지금. "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네. 하나뿐인 애인이 다섯 살 때의 모습이라니. 내가 모르고 있던 모습을 알게 되어 행복한 거지, 즐거운 게 아니라. "


그게 그 말이잖아! 한유진은 이대로 복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옆에 있던 컵에 찬물을 한가득 담아 꿀꺽꿀꺽, 하고 원샷했다. 여태껏 했던 생각은 모조리 취소였다. 취소, 삭제, 휴지통으로 이동, 영구삭제! 한유진은 지워버린 생각 대신 다른 의심을 끼워 넣었다. 성현제는 변태인가? 그렇지만 이건 애인에겐 너무한 일, .... 음, 모르겠다. 한유진은 스쳐 지나간 지난날들의 기억들에 우선 휴지통으로 이동만 시켜뒀다. 영구삭제의 운명에 처할지는, 성현제의 앞으로의 행동들에 달려있었다. 어쨌든, 기억들을 삭제시키고 이동시키는 중에도 한유진의 몸은 너무나도 편했다. 성현제의 품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알맞았으며 아늑했다. 전기로도 보온이 되나. 순식간에 애인을 보온병쯤으로 여겨버린 한유진은 약간 양심이 찔려 자그만 손으로 성현제의 뺨을 쓰다듬었다. 정전기가 일지 않는 걸 보니 스킬은 안 쓰는 모양이지. 한유진은 이 온기를 성현제의 체온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도 그럴 테고.


`아이는 잘 먹고 잘 자야 한다.` 라는 성현제의 모토에 따라 오늘도 아침, 점심에 디저트, 간식까지 열심히 먹은 한유진은 어김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이쯤 되면 음식에 수면제라도 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독 저항이 생각나 배불리 먹은 것의 결과물이라 생각했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가 꾸물거리며 성현제의 품에 파고들었다. 흉통을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에 왠지 모르게 편안해진 한유진은 그대로 또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딱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 흠냐.


성현제는 자신의 옆에서 세상 모르고 자는 한유진을 보고 입꼬릴 끌어올려 웃었다. 한유진과 있을 때는 평소보다도 웃음이 늘었는데, 이 모습이 된 후에는 웃는 일이 더 잦아진 것을 자신도 느꼈다. 하지만 어쩌랴, 이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것을. 콩깍지를 모조리 벗겨내고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한유진의 볼을 한 번 콕, 찔렀다가 행여 깰까 조심히 손을 거두었다. 어려진 한유진을 혼자 두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것이 많고 걱정이 되어 던전을 나온 이후로 출근도 않고 이렇게 유진이 잠든 틈을 타 사택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한유진과 온종일을 같이 지낼 수 있다면 평소보다 밀려드는 일쯤이야,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거기에 그 많은 양의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한 몫 했다.


" 우음.... "


깨려는 건가. 두 시간만 잔다더니, 어느새 어둑해진 바깥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 벌써 기대가 되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한유진을 바라보던 성현제는 일어나려는 기미가 없자 픽 웃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려져서인지, 따끈한 온기가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을 타고 올라왔다. 이내 화면을 채우는 메시지에 성현제는 작게 눈가를 찌푸리고는 다시금 노트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둑해지다 못해 온통 검은색 일색인 창밖에 성현제는 줄곧 두드리던 노트북을 덮었다. 뒤척이며 제게 몸을 붙여오는 한유진에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손을 뻗다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얇은 옷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 유진아? "


불안한 마음에 얼굴을 가린 흑색 머리를 손으로 살살 걷었다. 색색 몰아쉬는 숨과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 성현제는 철렁,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침대 옆 서랍에서 약을 꺼내려다가 모조리 헌터용인 것을 깨닫고는 거칠게 서랍을 밀어 닫았다. 한유진이 아프리라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이었다. 바깥의 약국에서 약을 사 온다 하더라도 독 저항이 있으니 무용지물일 터였다. 그렇다고 세성의 병원에 데려가는 것은 한유진의 상태를 동네방네 알리는 꼴이 되어버린다. 거기까지 빠르게 생각을 끝낸 성현제는 서랍장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켜 강소영에게 연락했다. 약조차 듣지 않는다면 힐러밖엔 답이 없었다.


강소영과 힐러가 도착할 동안, 성현제는 한유진을 품에 안아 어느새 흘러내리고 있는 식은땀을 훔쳐주었다. 기다리는 몇 분이 몇 시간, 아니. 몇십 년과도 같았다. 눈이 안 보인다 할 때보다도 더 심란한 마음에 성현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눈을 내어주면 되는 것이고, 한쪽 팔을 쓰지 못한다면 자신의 팔을 내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픈 것에는 성현제는 아직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지 못했다. 잔뜩 곤두세운 감각에 포탈의 마나가 얽혀드는 것을 느낀 순간 곧장 성현제는 발걸음을 옮겨 거실로 향했다.


" 유진 군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은 넣어 두는 게 좋을 텐데. "


한유진을 보자마자 입을 떼려는 힐러에게 성현제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잊은 것이 아니냐는 말에 힐러는 서둘러 한유진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내 시작되는 치료에 조금 마음을 놓다가도 난처한 얼굴이 된 힐러에 다시금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었다.


" 무슨 일인가. "
" 저, 처음에는 감기인 듯해서 치료를 시도했으나 나을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우선 임시방편으로 열은 낮췄습니다. 약은... "
" 되었네. 가보게나. "


협박 같은 함구령을 내려 힐러를 내보낸 성현제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본질적인 문제, 라는 말에 성현제는 순간 던전을 생각했다. 신입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열이 내려 차츰 고른 숨소리를 내는 한유진의 뺨을 슬 쓸었다. 만약, 신입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면. 성현제는 그 가설은 생각의 선에 두고 싶지 않아 잘라내었다. 성현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잘라내고 끊어내다 결국 자책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정말 `고작` S급이 된 기분이어서. 자신의 부주의로 한유진이 아픈 모습을 보게 되어서. 저도 모르게 성현제의 얼굴이 구겨지고 있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날이 밝도록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런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면 성현제는 이곳에 발붙이고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미련 따위 없이, 초승달의 뜻대로 움직여야-.


" 성, 현제씨.. "


성현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환청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의심하다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품으로 시선을 옮기니,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엉망인 얼굴이 비쳤다.


" 왜 꼴이 이 모양입니까.. "
"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네. "


성현제는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지만, 세상의 모든 색을 담은 듯한 그 눈을 보니 다시금 미소가 지어졌다. 길게 하품한 한유진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성현제의 품에서 뒤척였다. 자신을 떨어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움직임에, 성현제는 그를 안은 팔을 더욱 단단히 했다. 콩닥콩닥 뛰는 맥박에 점차 자신이 안정되는 것을 느낀 성현제는 어느새 드러난 한유진의 이마에 잘게 입 맞췄다. 한유진은 간지러운 듯 웃다가도 성현제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 벌써 밤이네요... 기왕 밤인 거, 그냥 아침에 일어나면 안 됩니까.. 아침밥은 많이 먹을 테니까.. "
"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유진아. "


말을 끝내기 무섭게 다시 잠이 든 한유진에 성현제는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기왕 밤인 거 아침에 일어나기로 하자. 이제는 한유진이 아프다면 자다가도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성현제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한유진의 곁에 자리했다. 오늘치 육아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끄응-.. 아우, 허리야. 얼마나 잔 거지... "


 흰 이불에 칭칭 묶인 듯이 파묻혀있던 한유진은 팔다리를 휘적거려 겨우 이불 뭉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 잔 탓인지, 온몸이 뻐근하고 둔한 느낌이었다. 네신가 다섯 시쯤부터 잤으니까…. 하나, 둘, 셋.... 와, 열 다섯 시간. 최장기록을 세운 한유진은 스스로에게 놀라며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그렇게나 잘 먹었는데 통통하던 손에 살이 다 빠졌..... 엥? 한유진은 마르고 길게 뻗은 손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것도 잠시,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욕실로 향했다. 침대에서 내려설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뛰어내리지 않아도 됐다. 자신의 두 발이 당연하다는 듯 바닥을 딛는 것이 어색했다. 욕실에 비친 한유진의 모습은 약간 마른 뺨, 길게 뻗은 손, 세면대를 짚을 수 있는 키, 슬리퍼가 조금 남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맞는 발. 25살의 모습으로 돌아온 한유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드디어 돌아왔다! 성현제도 알고 있을까, 라는 마음에 즐겁게 다시 침실로 돌아온 한유진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나는 분명히 이불 뭉치를 풀고 나왔는데. 뭐지? 자신이 누웠던 자리 옆의 조그만, 수상한 이불 뭉치에 한유진은 조심스레 다가가 그것을 들춰냈다.


" 좋은 아침이네, 유진 군^^ "
" 으악!!!!!!!! 무슨 꼴입니까, 이게!!! "


그것은 이불 뭉치가 아니라 작아진, 그러니까…. 한 대여섯 살 즘 되어 보이는 모습의 성현제였다. 그저 즐거운지 웃고 있는 성현제에, 한유진은 귓가에 `미안해요, 허니~~~ㅠㅠㅠㅠ` 하는 신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S급의 육아는 S급이었다. 그럼 `완벽한 양육자` 칭호를 가진 F급의 육아는 F급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