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 @tower_bri
출산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림아 다녀올게, 이따 봐~."
차에 타면서 다정하게 손을 흔드는 유진의 얼굴엔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요 앞에 잠깐 산책 나가는 듯, 아니면 평소처럼 출근이라도 하는 듯 차림새도 가볍고 평온했다. 그 때문인지 배웅하던 박예림도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아저씨 다녀오세요~' 를 외쳤고 피스를 안은 채 차가 떠나는 걸 지켜보다 집으로 들어갔지만.
지극히 평화로운 이 장면은 놀랍게도 병원에 아이를 낳으러 가는 출산 길이었다.
한유진이 해야 마땅할 긴장은 그를 데려다주는 운전 기사가 대신하고 있었는데, 그의 딱딱하게 굳어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어깨를 보면 세성 길드장의 배우자이자 해연 길드장의 형이 아이 낳으러 가는 길을 불편하게 하기라도 하면 그 자신의 생명이 오늘로 끝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유진의 비서도 그 비슷한 얼굴이었는데, 사실 그들이 생각하는 게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가야, 드디어 얼굴을 보는구나."
그런 두 사람의 심경은 깨닫지 못한 채 한유진은 다정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리 태연한 낯을 하고 있는 건 뱃속의 아이가 벌써부터 너무 사랑스러워 빨리 만나기를 학수고대 해왔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공포 저항을 켜두어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줄줄 흐를 과정을 곧 겪게 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두 개도 큰 이유였으나 그렇다 해도 출산을 앞두고 있다면 근본적으로 무서움을 느끼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유진이 시계를 보며 진통이 좀 더 일찍 찾아올지 딱 맞게 찾아올지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셈해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한 번뿐이 아니었으니 도가 틀 수밖에.
이번이 몇 번째 출산이더라? 쌍둥이가 있으니까 자꾸 헷갈리네. 우리 아이가 일곱인데 넷째랑 다섯째가 쌍둥이니까 여섯 번이고, 그럼 이번이 일곱 번째인가? 유진은 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일곱 번이라니. 그럼 떨지 않을 만도 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일곱 번 정도 하면 익숙해진다. 번지 점프를 한다 해도 일곱 번이면 슬슬 시큰둥해질 것이다. (아마도)
거기다 유진은 허약해보이는 체질과 달리 골반이 넓고 임신에 적합한 체질이라서 숨풍숨풍 쉽게 낳는 순산만 경험해왔었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나 또 한 번 그 과정을 거치는 건 별로 큰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 전 남편한테 "유진아 솔직하게 대답해야지."란 말로 찍어 누름을 당할 때 겪었던 고통이 더 힘들었을거다. 그 말을 하면 성현제는 지금도 미안해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초산 때는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뒤에도 꽤 떨고 긴장하고 그랬는데 몇 번 해보니까 이젠 별 거 아니더라. 자주 쓰면 안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힐러와 포션도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다. 유진에게 출산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병원에 다 와갈 즈음, 유진의 낯을 살피던 비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길드장 님께서는 진통이 시작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장 달려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럴 것 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출산이니까요. 배우자가 출산을 할 때 일하느라 나몰라라 하고 싶지는 않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가족의 탄생도 맞이하고 싶다 하셨고요."
"그건.. 그렇네요."
뒷 말에 유진이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본인만의 아이가 아니다. 모든 유진의 아이는 성현제 그 사람의 아이이기도 하니 아빠에게 아이의 첫 탄생을 보지 말라고 할 순 없었다. 요즘 들어 바빠진 세성 길드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오지 말라 했지만 남편이 늦게라도 온다고 하니 솔직하게 기분이 좋아져 유진은 빙긋 웃었다.
사실 이 차에 성현제가 함께 타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큰 자제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초산 때 성현제가 어떻게 굴었는지를 생각하면 이것도 유진의 만류에 그가 하는 수 없이 넘어가준 것이다. 그땐 한유진 본인도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지만, 성현제 역시 떨고 있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S급의 여유로운 모습조차 온데간데 없어진 채로 유진을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질주한 남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공포로 인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걸 유진은 아직도 기억했다.
보통의 다른 오메가들과 비교해볼 때 유진은 임신 기간을 수월하게 넘긴 편이었고 그 흔한 입덧조차도 없어서 성현제가 '입덧에 고생하는 부인을 위해 음식을 사다 나르는 게 로망이었는데 조금 실망이군. 하지만 유진 군이 힘든 것보다는 잘 먹는 게 낫네.'라고 말할 정도였는다. 그런데 그 때 행운을 써버린 탓인지 진통이 예정일보다 일찍 왔던 것이다.
다리 사이에서 양수가 새기 시작했고 한유진과 성현제는 나란히 패닉에 빠졌다. 예상 밖의 상황에 놀란 유진이 덜덜 떨며 아픔을 호소하기 시작해서, 안 그래도 유진이 아픈 것을 싫어하는 성현제는 더 당황하기 시작했었다. 어찌어찌 유진이 산실에 들어간 뒤에도 그 앞을 미친듯이 왔다갔다하며 간호사와 의사들을 닦달했다고도 했었다. 그 위압에 병원 직원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단 모양이다. 옆에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현까지 있었으니 그 흉흉한 분위기는 안봐도 뻔했다. 다 잘되서 정말 다행이었지.
아이가 무사하게 태어난 다음, 아이를 안아보기보다 먼저 유진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의 손을 잡아보았던 성현제의 애타는 표정은 아직도 선하게 유진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아이에겐 미안할지 몰라도 그 순간 성현제는 한유진이 우선이었고 유진은 솔직하게 그것이 기뻤다. 나중에 듣자하니 유진을 여기서 잃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생각으로 좀처럼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를 잃는 게 성현제에겐 가장 큰 공포였다나? 유진도 그 상황을 상상하고 좀 무서워졌다. 제가 죽는 건 크게 두렵지 않지만 다신 성현제를 못 보는 건 싫고 거기다, 제가 죽은 뒤 아이만 살아 성현제 옆에 남겨두면 그 이가 아이를 어떻게 대할 지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성현제는 제 아이들을 사랑하고 예뻐하며 좋은 아빠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출산 뒤 세네 달까지는 아이와 내외를 했었다. 막판에 유진을 힘들게 했다는 원망도 있었고, 자신과 똑 닮은 작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임신 중에도 여러 번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연약해서 다치게 하면 어떡할지 걱정도 했었겠지. 그래서 유진이 아이와 아빠를 친하게 만들어주려고 열심히 징검다리 노릇을 해줬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지금의 행복한 가정은 아마도..
아니, 불행한 생각은 하지 말자.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대신 유진은 그때의 해프닝이 두번째 출산에서 과보호로 이어졌던 생각을 했다. 또 진통이 먼저 오고 양수가 샐까봐 성현제는 24시간 밀착하다시피 유진의 옆에 붙어있었다. 한유현은 그럴 거면 임신을 시키지 말지 뭐하러 그랬냐는 핀잔까지 했지만 콘돔을 쓰지 말자고 졸랐던 건 한유진 본인이었기 때문에 형제의 우애를 위해서 성현제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둘째는 첫째와 연년생이었고, 그리 철저하게 준비를 한 탓인지 수월하고 매끄럽게 출산 과정이 진행됐었다.
사실 첫째 때도 양수가 빠르게 터진 것 외엔 어려움이 없었다. 산실에 가서 힘 주라는 대로 몇 번 힘을 주고 하라는 거 하며 버텼더니 아이가 나와서 보기 드문 순산이라고 했는데 둘째 때는 더 쉬웠다. 이번엔 기어이 산실에 들어온 성현제가 출산 진행 과정 내내 유진의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둘째 아이는 그렇게 둘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부는 아들과 딸을 하나씩 얻게 되었다. 이상적인 비율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의 가정은 영원히 행복했습니다, 해피 엔딩. ...이라고 끝나면 좋았겠지만 유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실수를 반복했다. (하지만 대가가 예쁜 아이라면 실수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셋째 때도 성현제는 산실에 들어왔었다. 쌍둥이 때도. 여섯째 때부터 유진이 쫓아냈던 것 같다. 출산이 한둘도 아닌데 그렇게 유난 떨지 말라면서 부끄럽다고 가서 일하라고 했지. 그래도 성현제는 부득불 휴가를 내어 유진의 산실 앞에서 기다려 아이를 안아보았다. 오늘도 내쫓으려 했지만 온다는 걸 보면 여덟째도 아빠의 품에 제일 먼저 안기게 될 운명일 것이다. 무슨 말을 하려나. 이번에는 유진이 너를 닮았다고? 아니면 또 본인을 닮았다고?
그걸 생각하니 아이의 얼굴이 또 궁금해졌다. 첫째부터 여섯째까지는 모두 성현제를 닮아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일곱째는 한유진의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유진은 유현의 어린 시절을 닮아 좋아했지만 예상 외로 성현제는 더 많이 좋아했다. 한유현이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조카이기도 했으니 이번 아이도 유진을 닮았다면 유현의 애정을 한 톨이나마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아빠를 닮아 끝장나게 잘생기긴 하겠지. 성현제의 미모를 세상에 널리 퍼뜨렸다는 점에서 유진은 아이가 많은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저는 저 미모를 가진 아이를 늘림으로써 인류에 공헌을 했다는, 뭐 그런 생각이다. 다들 예정에는 없는 아이였지만 지금 와서는 '그게 뭐?' 란 생각이었다. 유진은 아이 모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제일 예정에 없는 건 성현제와의 결혼이었지. 결혼까지 한 지금은 뭐 그 이상의 의외는 없었다.
뭐 가끔 성현제가 이리 대가족을 만들 줄은 몰랐다는 평은 종종 듣곤 했다. 아이가 많으니 한유진과의 결합이 정략적인 건 아니었나보다는 뒷말을 듣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둘의 결혼을 해연과 세성의 정치적인 결합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는데 애를 숨풍숨풍 계속 낳는 걸 보니 그게 아니었단 것이다. '아저씨 자제요' '성현제 정력킹이네' 같은 댓글을 보며 킬킬거리는 것도 꽤 재밌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할 때도 자주 나오는 얘깃거리가 되기도 하고 말이지. 그렇지만 부끄럽다거나 후회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아이가 많다고 해서 경제에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성현제나 한유진이나 이 나라에서 제일 잘 버는 사람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개개인이 걸어다니는 대기업인데 대기업 둘이 병합했으니 아이 일곱, 이제는 여덟 정도야. 각자를 봐주는 베이비시터가 있고(하지만 그 중 아이를 제일 많이 보는 건 한유진이다) 아이를 보호하는 보디가드들도 여럿 고용을 했으며 모두에게 개인 방을 마련해주고 그 방의 가구들을 다 최고급으로 마련했는데도 돈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그러니 더 낳아도 되지 않겠어? 만약 또 생긴다면. 그리 생각했을 정도였다.
성현제나 한유현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생각이지만 유진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병원 복도를 걸어갔다. 물론 아이가 너무 많아지면 아이 하나하나에게 애정을 주고 케어하기가 힘들어 이 아이를 막내로 하자고 진작에 이야기를 마친 상황이지만 상황은 언제고 변할 수 있는 거니까. 생긴다면 굳이 뗄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또 임신을 하면 아이들이 소외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역시 당분간은 피임을 철저하게 하자. 아이를 떠올리니 곧장 생각이 바뀌는 걸 느끼며 유진은 침대에 누웠다. 올해로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째는 아빠의 부른 배를 신기해하며 동생을 기다렸지만 7살인 둘째는 아빠가 금방 피곤해하고 잠이 많아진 걸 서운해했더랬다. 색칠 놀이에 정신이 팔린 셋째와 넷째, 다섯째는 자기들끼리 노느라 오히려 부모에게는 신경을 안쓰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니까. 안 그래도 당분간 아기에게 시간을 뺏기면 더 서러워할 테니 있는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고 사랑을 줘야지.
어쩌면 오늘도 몇 명은 아빠를 보겠다고 병원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이따 올 거라는 성현제와 함께 오거나 혹은 명우나 예림이와 함께 방문을 할지도 모른다. 그럼 새로 태어난 동생이라고 아이에게 갓난 애기를 보여주고 앞으로 예뻐해달라고 부탁을 하자. 남매 혹은 형제 사이에 사이가 좋았으면 좋겠으니까. (그것이 유진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 중 제일 큰 것이었다.)
머릿 속으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며 유진은 이제 익숙해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막내를 만나기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나 여전히 긴장은 없었다. 조금씩 아픔이 느껴지긴 했으나 이것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질 고통이리라. 그리하여 유진은 씨익 웃었다.